시드니 대학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돌로 지어진 강의실과 아치형 창문들, 그리고 그 위로 드리운 고목들의 그림자.
오래된 흔적들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의 젊음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대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을 공유하며 자연스러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캠퍼스를 걷는 동안 시간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 발걸음 소리 등 그때의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은 맑았으며 오래된 건물사이 잔디가 즐비한 그 공간이
생전 처음 본 그 공간에 매료되어 한동안 움직일수 없었다.
시드니 대학을 둘러본 후,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 캄포즈 커피를 찾았다.
여행 중에도 커피 한 잔은 나를 가장 안정시키는 순간이다.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다가 에티오피아 원두로 내린 필터 커피를 선택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입안에 퍼진 향기가 예상 밖이었다.
지금까지 호주에서 마신 커피들은 주로 산미가 강하고 가벼운 맛이었지만, 이 커피는 달랐다.
신맛보다는 베르가못과 라임의 향이 은은하게 퍼졌고, 가벼움보다는 적당한 깊이감이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커피의 맛이라는 것을.
그동안 취향을 만들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호주에서의 에티오피아 커피가 내게 결정타를 안겨 준 셈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 이 작은 순간이 어쩐지 뿌듯했다.
카페를 나서며 다음으로 향한 곳은 디저트 카페였다.
시드니대학에서부터 이 디저트 카페까지 꽤 길이 멀었다.
걷기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달콤한 것이 생각났다.
쇼케이스 안에는 크고 작은 디저트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딸기와 수박이 어우러진 작은 케이크였다.
한 조각을 포크로 잘라 입에 넣는 순간, 수박의 시원한 과즙과 딸기의 새콤달콤한 맛이 어우러졌다.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기 충분한 청량함이였다.
부드러운 크림 사이에 스며든 과일의 조화는 내가 알던 어떤 디저트보다도 상쾌하고 특별했다.
여행 중 마신 커피 한 잔과 먹은 케이크 한 조각.
단순한 일상 같지만, 그 속에서 내 취향과 기호를 조금 더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커피는 나의 취향을 일깨워주었고, 케이크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이처럼 여행의 매력은 종종 이런 작은 순간에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이 나를 만족시키는지 깨닫는 순간들.
커피와 케이크를 통해 나를 조금 더 알게 된 하루였다.
휴버트
해가 저물 무렵, 나는 시드니의 한 재즈바를 찾았다.
길 가에 자리 잡은 작은 나무문이 나의 발걸음을 잡아당겼고 그렇게 문을열고
어두운 계단으로 홀린듯 내려갔다.
바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조명이 어둠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벽에는 어둠에 가려저 그림인지 낡은 앨범 커버인지 모를 액자들이 붙어있었고
그 밑으로는 와인병이 나란히 서있었다.
식탁에는 오직 촛불 하나만 자리를 밝혀주었고
무대에는 빨간 커튼이 연주자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무대 위에는 세 명의 연주자가 있었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 중년의 음악가들은 저마다의 여유를 가지고있었다.
특히 드럼연주자는 꽤나 드럼을 섬세하고 힘을 빼고 연주를 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다.
피아노가 첫 마디를 시작하면, 콘트라베이스가 그 흐름을 받았다.
드럼이 그 사이를 메우며 리듬을 짚어나갔다.
악기들은 마치 대화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연주를 바라보다 문득 멍해졌다.
그 순간, 예전에 음악을 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그들처럼 음악을 온전히 즐기며 연주했었을까? 아니면 악보를 좇기에 바빠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를 놓치고 있었던 걸까?
나는 한참 동안 그 질문 속에 머물렀다.
음악이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음표와 리듬을 맞추는 기술적인 과정이 아니라,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연주는 틀림없이 음악을 즐기는 자들의 것이었다.
기교를 뽐내거나 과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의 소리를 하나로 엮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그 순간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다.
내가 과거에 음악을 했던 시간들은 어땠을까?
그 순간을 곱씹으며 나는 그동안 놓쳤던 음악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운 속에서
연주가 끝나자 작은 박수 소리가 가득 찼다.
연주자들은 가볍게 웃으며 서로의 시선을 맞췄다.
나는 마치 한 곡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것처럼 깊은 여운에 잠겼다.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특별한 언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또 다른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음악을 하던 시절, 그 순간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때는 꽤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던 이 길.
그러나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음악과는 조금 다른 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음악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은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 꽤 깊이 자리잡고있다.
그것은 단순히 추억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중요한 조각이다.
리듬을 느끼고, 조화를 고민하고, 순간에 몰입했던 경험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하든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비록 무대 위에서의 연주는 더 이상 내 삶의 일부가 아니지만,
음악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형태로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
오늘 밤 재즈바에서 들었던 연주처럼, 내 삶에도 각기 다른 악기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스테이크와, 샐러드, 구운 버섯 요리. 재즈 선율을 배경으로 한 저녁 식사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경험이었다.
식사를 하며 나는 눈을 감고 음악에 더 집중해 보았다.
베이스의 묵직한 음색과 피아노의 부드러운 선율이 서로 어우러지고,
드럼의 리듬이 공간을 단단히 채워주고 있었다.
음표 하나하나가 내 감각을 깨우는 듯했다.
음악은 언어가 아니지만, 그날의 재즈는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시드니라는 도시가 가진 자유로움과 여유를 음악을 통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드니의 감각들
시드니에서 보낸 하루는 단순히 눈으로 본 풍경을 넘어, 듣고 느끼는 경험이었다.
오래된 건축물 속 젊은 학생들의 활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 선율.
그것들은 모두 시드니라는 공간을 완성하는 중요한 조각들이었다.
이 도시에서의 감각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공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곳에서 어떻게 과거와 현재를 함께 살아가고 있을까?
그날의 밤, 시드니의 불빛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다른 감각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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