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한 번쯤은 현지 투어를 신청하는 것이 좋다. 파리에서 몽생미셸을 방문했을 때처럼, 현지의 가이드가 그곳의 역사와 유래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이번엔 호주에서 블루마운틴스를 방문했다. 그 이름처럼 산들이 파랗게 보인다고 하여 블루마운틴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 덕분이라고 했으나, 이제는 빛의 산란 때문이라는 과학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블루마운틴은 단순한 산이 아닌, 거대한 산맥이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블루마운틴스의 진면목을 보려면 시티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길을 따라 산맥과 협곡을 지나며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산을 내려가면, 첫 번째로 마주하는 것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다. 나무들 사이로 퍼지는 유칼립투스 향은 강렬하며, 그 사이를 걸을 때 나는 오직 흙을 밟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만을 들을 수 있었다. 기계 소리, 자동차 소리가 없는 공간에서 걷다 보니, 어느새 내 청각이 회복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해서 내려가다 보면, 공간이 달라진다. 유칼립투스 향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촉촉하고 시원한 공기와 함께 고사리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이 고사리는 우리가 아는 고사리가 아니었다. 어릴 적 지구과학 시간에 봤던, 상상 속의 거대한 고사리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사리가 자라기 위해서는 꺾여야 더 높이 자란다고 한다. “꺾여야 자란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삶을 돌아보았다. 꺾이는 것을 두려워하면 성장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자연에서 얻은 큰 교훈처럼 느껴졌다.
협곡의 맨 밑바닥에 도달했을 때, 양옆은 높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사이로 강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건널 때는 물이 돌에 부딪히며 나는 졸졸졸 하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물속에서 보이는 주황색의 가재는 이곳 블루마운틴스의 특이한 모습이었다. “주황색이라면 다 익은 건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의 신비로움을 실감했다.
그 강물에 발을 담그고 나서는, 찬물 속에서 짜릿한 기운을 느꼈다. 그 순간, 묵혀두었던 내 활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곳의 자연과 함께 걷고, 그 속에서 나오는 다양한 향기와 소리, 그리고 고요한 풍경을 경험하는 동안, 어릴 적 현장체험학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만약 그때 들었다면 따분했을 이야기들도, 지금은 흥미롭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블루마운틴스에서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은 실로 강렬했다. 고사리의 향기, 티트리의 레몬 민트와 라벤더 향, 매미들의 다양한 색깔과 소리, 주황색 블루마운틴 가재까지.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낸 풍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지층이 융기하며 나무가 뒤덮인 그곳에서 자연의 시간을 바라보며, 나는 그 경외감에 휩싸여 있었다.
시드니 대학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돌로 지어진 강의실과 아치형 창문들, 그리고 그 위로 드리운 고목들의 그림자. 오래된 흔적들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의 젊음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대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을 공유하며 자연스러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캠퍼스를 걷는 동안 시간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 발걸음 소리 등 그때의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은 맑았으며 오래된 건물사이 잔디가 즐비한 그 공간이 생전 처음 본 그 공간에 매료되어 한동안 움직일수 없었다.
시드니 대학을 둘러본 후,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 캄포즈 커피를 찾았다. 여행 중에도 커피 한 잔은 나를 가장 안정시키는 순간이다.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다가 에티오피아 원두로 내린 필터 커피를 선택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입안에 퍼진 향기가 예상 밖이었다. 지금까지 호주에서 마신 커피들은 주로 산미가 강하고 가벼운 맛이었지만, 이 커피는 달랐다. 신맛보다는 베르가못과 라임의 향이 은은하게 퍼졌고, 가벼움보다는 적당한 깊이감이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커피의 맛이라는 것을.
그동안 취향을 만들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호주에서의 에티오피아 커피가 내게 결정타를 안겨 준 셈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 이 작은 순간이 어쩐지 뿌듯했다.
카페를 나서며 다음으로 향한 곳은 디저트 카페였다. 시드니대학에서부터 이 디저트 카페까지 꽤 길이 멀었다. 걷기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달콤한 것이 생각났다.
쇼케이스 안에는 크고 작은 디저트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딸기와 수박이 어우러진 작은 케이크였다.
한 조각을 포크로 잘라 입에 넣는 순간, 수박의 시원한 과즙과 딸기의 새콤달콤한 맛이 어우러졌다.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기 충분한 청량함이였다. 부드러운 크림 사이에 스며든 과일의 조화는 내가 알던 어떤 디저트보다도 상쾌하고 특별했다.
여행 중 마신 커피 한 잔과 먹은 케이크 한 조각. 단순한 일상 같지만, 그 속에서 내 취향과 기호를 조금 더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커피는 나의 취향을 일깨워주었고, 케이크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이처럼 여행의 매력은 종종 이런 작은 순간에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이 나를 만족시키는지 깨닫는 순간들. 커피와 케이크를 통해 나를 조금 더 알게 된 하루였다.
휴버트
해가 저물 무렵, 나는 시드니의 한 재즈바를 찾았다. 길 가에 자리 잡은 작은 나무문이 나의 발걸음을 잡아당겼고 그렇게 문을열고 어두운 계단으로 홀린듯 내려갔다. 바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조명이 어둠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벽에는 어둠에 가려저 그림인지 낡은 앨범 커버인지 모를 액자들이 붙어있었고 그 밑으로는 와인병이 나란히 서있었다. 식탁에는 오직 촛불 하나만 자리를 밝혀주었고 무대에는 빨간 커튼이 연주자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무대 위에는 세 명의 연주자가 있었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 중년의 음악가들은 저마다의 여유를 가지고있었다. 특히 드럼연주자는 꽤나 드럼을 섬세하고 힘을 빼고 연주를 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다.
피아노가 첫 마디를 시작하면, 콘트라베이스가 그 흐름을 받았다. 드럼이 그 사이를 메우며 리듬을 짚어나갔다. 악기들은 마치 대화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연주를 바라보다 문득 멍해졌다.
그 순간, 예전에 음악을 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그들처럼 음악을 온전히 즐기며 연주했었을까? 아니면 악보를 좇기에 바빠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를 놓치고 있었던 걸까? 나는 한참 동안 그 질문 속에 머물렀다.
음악이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음표와 리듬을 맞추는 기술적인 과정이 아니라,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연주는 틀림없이 음악을 즐기는 자들의 것이었다. 기교를 뽐내거나 과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의 소리를 하나로 엮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그 순간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다.
내가 과거에 음악을 했던 시간들은 어땠을까? 그 순간을 곱씹으며 나는 그동안 놓쳤던 음악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운 속에서 연주가 끝나자 작은 박수 소리가 가득 찼다. 연주자들은 가볍게 웃으며 서로의 시선을 맞췄다. 나는 마치 한 곡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것처럼 깊은 여운에 잠겼다.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특별한 언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또 다른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음악을 하던 시절, 그 순간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때는 꽤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던 이 길.
그러나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음악과는 조금 다른 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음악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은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 꽤 깊이 자리잡고있다. 그것은 단순히 추억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중요한 조각이다. 리듬을 느끼고, 조화를 고민하고, 순간에 몰입했던 경험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하든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비록 무대 위에서의 연주는 더 이상 내 삶의 일부가 아니지만, 음악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형태로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 오늘 밤 재즈바에서 들었던 연주처럼, 내 삶에도 각기 다른 악기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스테이크와, 샐러드, 구운 버섯 요리. 재즈 선율을 배경으로 한 저녁 식사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경험이었다.
식사를 하며 나는 눈을 감고 음악에 더 집중해 보았다. 베이스의 묵직한 음색과 피아노의 부드러운 선율이 서로 어우러지고, 드럼의 리듬이 공간을 단단히 채워주고 있었다. 음표 하나하나가 내 감각을 깨우는 듯했다.
음악은 언어가 아니지만, 그날의 재즈는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시드니라는 도시가 가진 자유로움과 여유를 음악을 통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드니의 감각들
시드니에서 보낸 하루는 단순히 눈으로 본 풍경을 넘어, 듣고 느끼는 경험이었다. 오래된 건축물 속 젊은 학생들의 활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 선율. 그것들은 모두 시드니라는 공간을 완성하는 중요한 조각들이었다.
이 도시에서의 감각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공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곳에서 어떻게 과거와 현재를 함께 살아가고 있을까?
그날의 밤, 시드니의 불빛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다른 감각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호주 하면 떠오르는 동물들이 있다. 캥거루와 코알라. 이 둘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시드니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페더데일 동물원.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만질 수도 있다니, 조금은 낯설고 설레는 마음으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동물원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반겨준 건 왈라비들이었다. 내가 손에 먹이를 들고 있어서일까, 저마다 다가오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작고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 그리고 다소 느닷없이 내 손을 움켜쥔 작은 손. 그 순간 느껴진 왈라비의 감촉은 놀라웠다. 마치 나뭇가지처럼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가락. 그 작은 손에 담긴 힘은 내 손을 살짝 움켜쥐며 먹이를 받아가는데, 자연스러운 연결감이 마음을 간질였다.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코알라가 나를 맞이했다.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느릿느릿 움직이며 나뭇가지를 옮겨 다녔다. 나무 위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어찌나 여유로워 보이던지.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왜 나도 저렇게 느긋하고 게으른 하루를 보내지 못했을까? ‘갓생’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다그치던 나날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해 쉴 새 없이 뛰어왔던 시간들. 코알라를 보며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공간에서는 캥거루, 웜뱃, 그리고 쿼카가 있었다. 미디어로만 보던 동물들을 가까이서 만나는 경험은 특별했다. 특히 쿼카는 작은 몸집에 늘 웃고 있는 얼굴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표정은 무표정, 뭔가 심드렁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먹이를 주자 순순히 받아먹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작은 동물들이 만들어낸 이 작은 기쁨들이, 여행의 특별한 장면들로 남았다.
코스탈 워크: 걷는 동안 스며드는 풍경
쿠지 해변에서 시작된 코스탈 워크는 바다와 절벽이 어우러진 산책 코스였다. 나는 쿠지 해변에서 시작해 브론테 해변을 지나 본다이 비치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바닷가를 따라 걷는 동안, 낯선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가까이서 부서지는 파도가 겹쳐지며 만들어낸 웅장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파도가 치는 소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햇살, 바람에 흩날리는 소금기 섞인 공기. 모든 감각이 낯선 자극으로 가득 찼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공동묘지와도 마주하게 된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그 공간은 묘하게 평온했고, 묘비들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그곳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이런 풍경이 주는 새로움에 자꾸만 발걸음이 멈췄다.
마침내 본다이 비치에 도착했을 때, 해는 노을로 바뀌고 있었다. 붉은빛이 바다 위로 물들어가며 잔잔히 퍼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비누방울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방울은 공중에서 빛을 받으며 반짝이다 톡 하고 터졌다. 아이들이 비누방울을 쫓아다니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혼자 걷던 공원에서 마주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맑은 하늘, 그날의 잔잔한 행복감이 겹쳐졌다. 기억은 희미했지만 감정은 여전히 생생했다. 왜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아련함에 잠시 빠져들었다.
느림의 미학과 평화로움
해변 끝에서 바라본 풍경은 하나의 그림 같았다. 노을 속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람들,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 갈매기 울음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완벽한 평화를 만들어냈다.
이게 내가 찾고 싶었던 평화가 아니었을까? 나는 카메라를 꺼내 그 순간을 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평화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그저 조금 더 천천히, 나를 놓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새로운 기대를 안고 호주에 도착했다. 사실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알고 있던 건 커피가 유명하다는 사실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보만으로 낯선 땅에 발을 디뎠다.
쏟아지는 태양 아래, 건물들은 저마다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높게 솟아오른 자카란다 나무는 마치 나를 환영하듯 보랏빛 꽃을 흔들고 있었다. 그 풍경은 호주에서의 첫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짐을 숙소에 두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아슬란 카페였다. 호주의 커피가 그토록 유명하다던데,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자바 원두로 내린 롱블랙커피와 라테를 각각 한 잔씩 주문했다.
롱블랙의 첫 모금은 예상보다 강렬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산미가 나를 놀라게 했다. 전에 호주 원두를 선물 받아 산미가 강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직접 마셔보니 훨씬 산뜻하고 가벼운 느낌이었다. 바디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산뜻함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반면 라테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원두와 우유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깊고 부드러웠다. 거품이 입안을 가득 채울 때면 커피 향이 온 신경을 자극했다. 그렇게 커피의 여운을 즐기며 카페를 나섰다.
The Rocks Market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더 록스 마켓이었다. 매주 일요일 열리는 시장이라니, 호주에서 마주한 첫 마켓이었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시장은 우리나라 오일장과 흡사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물건을 펼쳐놓고 팔고 있었고, 그 풍경 자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캥거루 육포가 눈에 띄었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것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호주에서 캥거루 고기를 판다니, 신기하면서도 낯설었다.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
시장을 지나니 하버브리지가 보였다. 다리 아래로 난 길을 따라가자 점점 더 눈앞에 커다란 건축물이 나타났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사진으로만 보던 랜드마크를 직접 마주하니 웅장함에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단순히 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독특한 곡선과 흰 외벽은 태양 아래에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풍경을 바라봤다.
노스 시드니와 루나파크
하버브리지를 따라 걸어 건너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노스 시드니는 깔끔하고 정갈한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마주한 또 다른 명소는 바로 루나파크였다. 밝게 빛나는 놀이공원의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후 보트를 타고 시드니 항구를 가로지르며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물 위에서 바라본 시드니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강렬했던 첫인상이 점차 부드럽게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낯선 땅, 그리고 호주에 대한 호기심
하루가 끝나갈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호주는 어떤 나라인가? 이곳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호주의 역사를 간략히 접했을 때, 그것은 영국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죄수 유배지로 시작된 나라. 하지만 지금의 호주는 그 시작을 넘어 너무도 다양한 매력을 지닌 곳이 되어 있었다.
짧은 하루였지만, 호주의 첫인상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커피 한 잔, 낯선 시장, 웅장한 건축물,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 모든 것이 호주라는 나라를 조금씩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마주할 또 다른 풍경과 이야기들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어딘가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어제의 연장선일 것 같은 느낌. 이런 상태를 누군가는 안정감이라 표현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권태로움이다. 의욕은 바닥을 치고,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이런 날들이 이어지다 보면 문득 생각한다. 이게 과연 행복한 삶일까?
삶에 권태가 찾아오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반복’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행복을 ‘반복 욕구’라 정의했다. 그래서 원형을 사는 강아지는 행복해질 수 있지만 직선을 사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말한다. 반복적인 패턴 속에 갇혀버린 인간은 결국 권태에 지배당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이 반복을 효율이라 부르며 우리에게 강요한다. 회사는 매뉴얼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표준화시키고, 우리의 감각보다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기계처럼 행동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 자신조차 잃어버린다.
반복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매일 같은 모니터를 보고, 같은 업무를 반복하며, 똑같은 풍경 속에 갇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감각은 점점 반응을 멈춘다. 한 번 자극이 무뎌지면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되고, 그 강도는 점점 올라간다.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한 사람은 눈이 쉽게 피로해지고, 청각에 민감한 사람은 작은 소음에도 예민해진다. 이렇게 높아진 자극의 역치값은 우리를 극단적으로 예민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사람은 더 이상 반복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감각은 균형을 잃고, 삶은 단조로움에 짓눌려 의미를 잃어간다.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나고, 사용하지 않던 감각을 깨우는 행위는 우리의 감각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보며 일하는 회사원이 바닷가로 떠나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집중해 보는 것. 혹은 시끄러운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이 조용한 곳에서 새로운 향을 맡아보는 것. 이런 작은 변화는 우리의 감각을 리셋해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감각을 깨우는 체험이다. 맨발로 바닷가 모래를 밟아보는 것은 단순하지만 강렬한 경험이다. 차갑고 부드러운 모래가 발을 감싸는 순간, 발끝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감각이 머릿속을 맑게 한다. 또 다른 예로, 음식 하나를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려보는 것도 의미 있다. 평소라면 상상도 하지 않을 일이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오히려 음식의 소중함과 가치를 느낄 수 있다. 낯선 호텔의 침대에 누워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 다른 온도의 이불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낯섦은 생각보다 우리의 감각을 깨어나게 한다.
삶에서 권태는 피할 수 없는 손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손님과 오래 동거할 필요는 없다. 때때로 일상을 잠시 떠나 새로운 자극 속에 나를 맡겨보자. 그렇게 하면 무뎌졌던 감각은 다시 깨어나고, 삶의 권태는 조금씩 사라질 것이다.
삶은 완벽히 새로워질 필요는 없다. 단지 새로운 시선을 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상이 다르게 보이고, 반복된 패턴 속에서도 작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자. 권태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언제나 우리의 감각 속에 숨어 있으니.